乳母, 한 조선여인의 생애

한국교육문화신문 | 기사입력 2017/06/29 [13:14]

乳母, 한 조선여인의 생애

한국교육문화신문 | 입력 : 2017/06/29 [13:14]

 

 역사는 항상 승자의 편에 서서 이긴자가 패자의 모든 것을 지워버리거나 간신이나 역적으로 모략해서 역사에 오명을 남긴 예는 많다.

필자 역시 지난간 역사를 보면서 가슴먹먹하고 때로는 울분도 느끼며 눈물도 흘리곤한다.

그러나 역사는 1회성으로 지나가는 물건이나 당장 쓰고 버리는 소모품이 아니다.

지나간 역사속에서 오늘의 우리를 돌아보고 그곳에서 교훈을 얻는다면 역사를 뛰어넘어 우리의 삶을 보다 자유롭고 윤택하게해주는 윤활유가 될 것이다.

폐쇠된 조선시대, 어느날 급박한 권력챙탈에 참화를 입은 주인집 도련님을 살려 가문을 잇게한 드라마틱한 이야기속 한 유모의 이야기가 가슴을 울린다 지나간 역사에서 잊혀진 한 조선여인의 생애를 살펴본다.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수자봉 기슭 솔 숲에 조선 시대 만들어진 조그마한 봉분 하나가 있다.

560여년 전 여덟 살 먹은 아이를 업고 이곳 상신 마을에 숨어든 이름없는 여인의 무덤이다.

비석에는 이렇게 써 있다.

'죽어서 예조참의 벼슬을 받은 인천 이씨윤원 혹은 태엽이라는 사람의 유모 무덤이다'.

그러나 비문에 그녀 이름은 없다.

그저 유모라고만 밝혀져 있다.

유모는 함경도 종성에서 여덟 살짜리 사내아들 태엽을 몰래 안고왔다.

세월은 덧없이 흘러 그녀는 죽음을 앞두고 아들을 삼은 연원에게 말했다.

'네 아비 이름은 징()자 옥()자 니라.

그리고 네 이름은 태엽이 아니라 윤원이니라. 네가 죽을 때까지 아비도 네 이름도 입 밖에 내지 말고 살거라."

이징옥(1399-1453)에 대해 국사 교과서는 조선 세조때 '반란을 일으킨 무장'이라고 평하고 있다. 하지만 조선실록에서는 '털어도 먼지 한 톨 나오지 않은 청렴결백한 장군으로 기술되어 있다.

그 강직한 군인, 이징옥은 훗날 왕위찬탈 쿠데타를 일으킨 수양대군에게 맞서 대금 제국을 건국하고 황제를 지칭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두 달이 채 되지 않아 부하장수 정종의 습격을 받고, 자객들에 의해 허무하게 죽었다.

이징옥 장군은 위용과 능력을 지녔지만 수양대군의 반대편에 서 반역자로 죽은 것이다.

그후 세조가 된 수양대군은 이징옥에게 지금은 반역을 한 신하이지만 후세에는 너를 두고 충신이라 할 것이다라고 했다.

정치적 불우로 뜻을 펴지 못했고, 대망을 품었으나 그것도 좌절되면서 이징옥은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았다.

그는 역사에 반역자가 되었지만 1698(숙종 24) 장릉지에 신원상소가 올려져 여러 차례 논의 끝에 1791(정조 15) 관작이 회복되고 충강(忠剛)의 시호가 내려져 장릉배식단에 배향되었다.

정조 사후에 다시 관작이 추탈되었으나 오랜 세월이 지나 1908(융희2)에야 복권되어 죄적에서 삭제되고 명예가 회복 되었다.

경북 양산 하북면 삼수리는 한자로 '삼사리(三師里)'인데 그 의미는 장수 셋이 나왔다는 마을을 뜻한다.

조선 초기에 활약했던 세 장수 이름은 이징석(1395~1461), 이징옥(1399~1453), 이징규(1403~1468)이다. 모두 10대에 무과를 급제해 남과 북으로 오랑캐 격퇴에 공을 세운 실존 인물들이다.

첫째인 이징석은 용맹하여 수양대군이 그를 특히 아꼈다.

수양이 왕위에 오른 뒤 이징석이 먼저 죽을 때 세조는 '어찌 이 늙은이를 두고 징석을 데려갔는가' 하고 하늘을 원망했다고 한다.

둘째 이징옥은 청렴결백하였다.

실록에 따르면 이징옥은 용감하고 위엄이 있어 여진족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였고청렴결백한 장수의 모범이었다.

여진족이 10리 밖에서 이징옥을 보면 두려움과 존경심에 말에서 내렸다고 한다.

그 강직함과 장수다움을 김종서가 특히 아꼈다.

셋째 이징규 또한 수양대군과 함께 명나라를 다녀온 뒤 수양 편에 섰다.

사건의 발단은 145310월 계유정난이었다.

세 형제 가운데 징석과 징규가 수양의 쿠테타에 가담한 반면, 둘째 징옥은 수양의 정적 김종서의 측근이었다

그 강직한 징옥이 수양을 지지할 리 만무하였다.

수양대군파는 함길도 절제사였던 이징옥을 파면하고 서울 복귀 명을 내렸다.

바로 죽이겠다는 뜻이었다.

이를 간파한 이징옥은 곧바로 후임으로 온 박호문을 죽이고 군사를 일으켜 스스로 왕이 되여 나라 이름은 대금(大金)이라 정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

그는 함길도 종성 땅에서 여진족을 규합해 대륙에 나라를 세우고 두만강 건너 오국성에 도읍을 정한 후 수양대군 무리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두 달이 채 되지 않아 종성부사 정종과 호군 이행검 등이 변절하여 이징옥을 습격하는 바람에 두 아들과 함께 피살된 것이다.

이렇게 이징옥은 역사에서 사라졌고 역사는 그를 반역자로 기록했다.

훗날 이징옥의 후손들은 본관을 인천으로 바꾸어버렸고, 막내 징규 후손 또한 다른 이유로 양산에서 영산으로 본을 바꾸었다.

성까지 바꿔버린 형제들 후손들은 560여년이 지난 1979년에야 비로소 화해를 했다.

인걸은 가도 땅은 역사를 기억하는 법이어서 양산에는 이 세 형제 생가터도 남아 있고 형제들 전설이 곳곳에 전해지고 있다.

함경도에서 이징옥의 두 자식이 죽고 막내 윤원만이 살아남았다.

여덟 살인 이 아이를 등에 업고 양산까지 내려온 사람이 바로 윤원의 유모이다.

유모는 양산에 있는 큰 아버지 이징석의 집을 찾았지만 외면당했다.

역적의 자식을 살려왔으니 당시로서는 당연했으리라.

그리하여 천리길을 내려온 유모가 다시 북상해 숨어든 곳이 바로 경주 상신마을이다.

그곳에서 유모는 자신이 속한 상전가족이 멸문지화를 당했는데 자기 피붙이도 아닌 윤원을 보살폈다.

역적의 자식을 버리면 목숨 부지는 물론 자기도 천민에서 벗어날 수도 있을 것을 한 조선여인은 그 아이를 죽을 때까지 보살폈다.

유모가 혼인은 했는지, 자식은 있었는지, 성은 무엇이며 이름은 무엇이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저 유모라는 흔적만 무덤 앞 상석에 새겨져 경주 상신마을 뒷산 기슭에 잠들어 있다.

그녀의 무덤가에 핀 제비꽃이 마치 나를 생각해주세요라고 말해주는 듯 하다.

우리가 참으로 위대하다는 찬사는 이럴 때 빛을 발할 수 있을 것이다.

윤원을 끝까지 보살펴 이징옥의 마지막 핏줄을 지킨 참으로 대단한 조선여인의 원동력은 어데서 왔을까?

이징옥과 그의 부인을 흠모했던 정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

가슴 먹먹한 무명의 조선여인의 생애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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