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 누 끼치면 “보안부 갔다”…광부 부인에겐 성고문이

[사북사태 광부 ‘박노연’-中] “원만한 합의 약속한 정부 약속 한낱 휴지조각”

김아름내 심경호 이명수 추광규 기자 | 기사입력 2017/11/07 [14:20]

회사에 누 끼치면 “보안부 갔다”…광부 부인에겐 성고문이

[사북사태 광부 ‘박노연’-中] “원만한 합의 약속한 정부 약속 한낱 휴지조각”

김아름내 심경호 이명수 추광규 기자 | 입력 : 2017/11/07 [14:20]

 

 

[특별취재팀] 서울의소리=이명수 심경호 기자, 우먼컨슈머=김아름내 기자, 신문고뉴스=추광규 기자

 

스스로를 ‘막장인생’ ‘한센인 다음에 광부’라며 체념적이고 자조적인 의식에 빠져 있던 광부들이 파출소를 습격했다. 흥분한 광부들은 진압경찰에 맞서 싸우면서 경찰관 1명이 사망하고  160여 명의 경찰과 민간인이 부상을 당했다. 1980년 4월 강원도 사북에서 발생한 비극이었다.

 

80년 사북사태라고 부르는 이 사건에 대해 당시 계엄사령부는 관련 인물 31명을 구속하고, 50명을 불구속 기소하는 등 총 81명을 군법회의에 송치하였다. 79년 박정희 시해로 찾아온 80년 서울의 봄을 싸늘하게 만든 사건이었다.

 

또 일제 강점기부터 누적되어온 탄광촌의 문제가 분출된 이 사건은 불과 한 달 후 광주에서 벌어질 참극의 전주곡이기도 했다. 37년 전 발생했던 사북사태가 현재의 우리에게 던지는 교훈은 무엇일까? 37년 전 사북사태의 한 복판에 있었던 늙은 광부들의 입을 통해 당시로 돌아가 보겠다.

 

당시 상황에 대한 보충자료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원회)의 2008년 4월 8일 결정문 등을 인용했다. 기사는 상-중-하로 나누어 총 3회에 걸쳐 게재한다.(기자 주)

 

 

 

▲ 37년전 사북을 증언하고 있는 당시 동원탄좌 선산부로 근무하던 박노현(78) 씨     © 추광규

 

 

# 눈앞 교통사고 목도..분노한 광부들 “이재기를 찾아라”

 

노조문제와 처우문제 등으로 누적되어 있던 광부들의 불만은 우연한 계기로 터져 나왔다. 진실화해위는 그 계기와 전개 상황에 대해 이렇게 정리했다.

 

“1980년 4월 21일 노조사무실 앞에서 일어난 교통사고는 노조사무실 내에서 노조원들의 항의 농성광경을 사진 채증하던 사복경찰관이 광부들의 위협을 피해 노조사무실 앞마당에 세워둔 경찰 지프차를 타고 달아나는 과정에서 발생한 우발적인 사건이었다. 흥분한 광부들이 경찰차를 가로막자 당황한 경찰관이 그대로 차를 몰아 넘어진 광부 원일오의 골반 부위를 타고 넘었고, 비상 구호 조치 없이 그대로 달아났다.

 

이때 또 다른 광부들이 경찰차를 피하거나 매달리면서 찰과상 등 부상을 입었다. 광부들은 우발적인 교통사고 결과보다 경찰차가 광부를 치고 난 후 아무런 조치도 없이 그대로 달아난 상황에 대하여 더욱 분노했다. 자조적인 의식에 빠져 있던 광부들에게 경찰차가 동료 광부를 치고 달아난 사건은 최소한의 인간대접마저 받지 못하고 있다는 분노와 함께 강한 연대의식을 격발시킨 사건이었다”

 

당시 상황에 대한 동원탄좌 선산부로 일하던 박노연(78)씨의 증언이다.

 

“그때 술 취한 종업원 하나를 경찰 지프차가 다리를 깔고 지나갔다. 다른 종업원이고 누구고 ‘경찰관이 여기 와서 사람 죽이려고 나왔다. 회사와 짰다’고 말하면서 불씨가 커졌다. 다음날 날이 밝았지만 이재기가 안 나타났다. 여자 몇 사람이 이재기 집을 급습했는데 아내 김순이가 있어 끌고 왔다. 이재기가 왜 거짓말을 하냐. 어제 사표 냈으면 되는데 왜 안했냐. 이재기 지금 어디 있냐고 묻는 등 굉장히 시끄러웠다”

 

진실화해위는 21일 밤 사북의 치안공백과 광부들의 동향에 대해 이렇게 전했다.

 

“19080. 4. 21 20시 경부터 사북지서가 광부와 주민들에 의해 점거됨으로써 ㈜동원탄좌가 소재한 사북리 일대는 경찰치안의 공백상태에 빠져 들었다. 그날 밤 사북광업소 곳곳에 십여 개의 황톳불이 밝혀진 가운데 광부들과 주민들은 삼삼오오 모여 밤을 지새웠다. 부녀자들은 곳곳에 솥을 걸어 국을 끓이고 밥을 지어 농성 광부들에게 제공하였다”

 

어용이라고 지탄받던 이재기 노조 지부장이 끝내 나타나지 않자 그에 대한 분노는 그의 아내에게로 향했다. 4월 22일 오전 광부와 주민들은 김순이씨를 광업소 정문 부근 게시판 기둥에 묶은 후 린치를 가했다. 김순이씨는 2007년 1월 6일 진실화해위 1차 진술청취에서 자신이 겪었던 상황을 이렇게 말했다.

 

“4월 22일 그날 광부들이 몰려온다는 얘기를 듣고 겁이나 옆에 사는 정명찬 씨의 집으로 피신을 했습니다. 그 집 안방 침대 밑에 있었는데 사람들이 몰려와 나를 발견하고는 마구 때리며 끌고 나갔습니다. (생략) 광업소 정문 근처 전봇대 기둥에 묶일 때 주위에는 1천여 명이 모여 있었던 것 같습니다. 기둥에 묶이고 난 후 더욱 구타가 심해졌습니다. 상의 하의를 모두 벗기고 온갖 난행을 저질렀습니다”

 

 

▲ 사북사태를 전하고 있는 동아일보     © 박노연씨 제공

 

 

# 경찰관 1명 사망 수십 명 중경상 입은 ‘안경다리’ 충돌은 무리한 경찰 진압 때문 

 

1980년 4월 21일 밤 관계기관 대책회의에 참석한 장성경찰서장 등이 광부들에 의해 폭행을 당하고 사북지서가 침탈당하는 등의 상황이  강원 도경에 보고되자 강원도경은 사태 진압에 나섰다. 당시 상황에 대해 진실화해위 결정문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사태는 숨 가쁘게 전개됐다.

 

강원도 경찰국장 유내형은 원주 횡성 홍천 영월 장성 평창 정선 각 경찰서에서 가용 경찰력을 최대한 끌어 모은 347여명의 경찰력을 앞세우고 22일 오전 11시경 진압에 들어갔다. 앞서 광업소 일대를 완전히 장악한 광부와 주민들은 진압병력 도착 전 사북읍내에서 광업소로 진입하는 유일한 길목인 철둑길 앞 안경다리 통로를 갱목으로 가로 막았다.

 

1,500여명 가량은 경사 45˚ 높이 10m정도의 안경다리 위쪽 철둑길에 운집해 있었다. 경찰은 최루탄을 쏘면서 안경다리 입구에 설치된 갱목 바리케이드를 걷고 진입을 시도했다. 이에 맞서 경사 45˚ 철도변 위에 있던 주민들이 돌과 각목을 던지며 진압에 저항하자 경찰병력은 순식간에 대열이 흩어졌다.

 

사북 민주화 항쟁 동지회 이원갑 회장(80)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사북은 철길쪽과 길 양쪽만 막으면 들어올 곳이 없다. 안경다리 철길 쪽에는 사람들이 쭉 서있었다. 철길이다 보니 전부 자갈밭이었다. 도로는 갱목으로 막아놓았는데 경찰이 최루탄을 쏘면서 진입해 들어왔다. 그런데 그날따라 바람이 역으로 위에서 밑으로 불면서 경찰 쪽의 피해가 컸다. 철로 변에 있던 자갈을 위에서 아래로 던지니까 철길에 자갈이 없어 질 정도로 던졌다. 부인들이 많이 나와 있었는데 돌을 나르고 광부들은 돌을 던져댔다. 순식간에 경찰이 허물어지면서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경찰들은 민가에서 사복으로 갈아입은 후 산으로 도망쳤다.”

 

이 과정에서 주민들이 던진 돌에 맞아 경찰 1명이 사망하고 70여명이 부상을 입는 대규모 유혈사태가 발생하였다.

 

현장 책임자였던 유 경찰국장은 진실화해위 조사에서 “수적으로 열세였고 지휘통제가 힘들었으며 시위진압 경험이 없었고 안전장비가 부족했으며 당시 도경 경비과장이 내 명령 없이 진입을 시도하면서 피해가 커졌다”고 말했다.

 

안경다리 충돌 당시 경찰관을 폭행한 혐의로 처벌받은 최돈혁 씨는 진실화해위 2006년 1차 조사에서 당시 상황에 이렇게 진술했다.

 

“광부들은 대열도 없이 웅성대고 일부는 안경다리 밑에 갱목으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으니까 경찰이 먼저 최루탄을 쏘고 들어왔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와 하며 돌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 대규모 충돌이 발생한 안경다리 철로변     © 사북항쟁동지회

 

 

진실화해위는 경찰병력의 피해가 커진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경찰 측 피해원인에 대한 조사에서 당시 강원 도경 국장을 비롯하여 1980. 4. 22 사태 진압 작전에 참여했던 경찰관은 모두 안경다리 진압작전의 실패를 시인하였다. 당시 경찰은 시위 진압 경험이 부족하고 진압복은 물론 진압장비 보호 장구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진압작전에 투입되었다. 흥분한 광부와 주민 수천 명이 45도 경사면 위쪽 철둑길에 운집해 있는 상황에서 인근 주민들과 현지 경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경찰 현장 지휘부의 무리한 시위 진압시도가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박노연씨는 22일 상황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전에 사건이 터지기 전에도 종업원들이 불만이 많았다. 회사에 누를 끼치면 죄인마냥 ‘보안부로 와요’ 이래서 혼나고 그랬다. 그러니까 종업원이 광부 더러워서 못해먹겠네 이랬다. 21, 22일에는 기억으로는 한 8~9천명 모인 것 같다. 열차가 못 지나가고 그랬다. 대단했다. 21일 오후부터 백골부대 경찰 등이 나타나고 그래도 돌멩이 투석전 벌어지고 하다보니까 공수부대들이 증산초등학교에 가서 대기하고 있다고 했다”

 

#광부들의 폭동이라던 사북사태... ‘3일간 사북에서는’

 

계엄사령부의 보도통제로 신문과 방송은 19080년 4월 24일 협상 타결 직후 보도를 시작했다

 

‘광부 3천5백 명 유혈난동’, ‘무법 휩쓴 공포의 탄광촌’, ‘부녀자들도 흥분 흉기 들고 거리 누벼’(이상 조선일보 1980.4.24. 기사제목)

 

‘무법 4일 공포의 탄광촌’, ‘곡괭이. 도끼 무장...파괴 방화’, ‘부녀자들도 흉기 들고 가세’(이상 동아일보 1980.4.24. 기사제목)

 

1980년 서울의 봄을 얼어붙게 했던 사북사태를 전하는 언론 보도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또 그것은 1980년 5월 광주에 대한 신군부의 가혹한 탄압을 예고한 것에 다름 아니었다. 하지만 5월 광주도 마찬가지였지만 4월 사북에서도 이 같은 언론 보도는 그 진실과는 한참 그 거리가 멀었다.

 

박노연 씨는 당시 상황에 대해 “(21일 저녁 상황) 밤새껏 이재기 잡아야 한다 해서 그러다가 한 2천명이 모였다. 새벽 1시쯤 됐는데 누군가 ‘이러지 말고 무기와 실탄 갖고 와서 이재기 쏴버리지 뭐’ 이랬다. 그래서 아차 무기 챙기면 지랄 나는데...’라고 생각했다.

 

이원갑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자기가 아는 20명을 불러서 화약고 감시를 하라고 했다. 광업소에서 4km 떨어져 있었는데 파견을 보냈다. 우리는 누구한테 지시받은 것도 없지만 자진해서 무기고 있는 곳으로 갔다. 종업원이 한 4,800명 정도 되면서 예비군 연대본부가 되다보니 칼빈총, 실탄 등이 2만발 이상 보관돼 있었을 것이다. 우리들 30명 정도는 막걸리를 한잔씩 마시면서 밤새 지켰다”고 증언했다.

 

이원갑 회장은 “4월 21일 오후에 민간인 자치방범대를 구성했다. 광부들이 시내로 내려가서 술 먹고 사고치는 것을 예방하고 민간인 피해가 없게끔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회사 사람들은 모두 도망가 버린 상황이었다.

 

동원탄좌에는 무기와 화약이 많았다. 화약만 해도 1천 톤 정도 됐는데 이 정도 양이면 폭발했을 경우 사북의 지형이 달라졌을 것이다. 불의의 사고가 날까봐서 무기고에는 참모들을 직접 보내서 철저하게 지키게 했다. 사람들도 많았다. 한군데 7~80명은 되었을 것이다. 지시가 있을 때까지 봉인 뜯으면 안된다고 철저하게 지시했다. 이 지시는 협상안이 타결되던 24일 오전 까지 이행되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 1980년 4월 23일 동원탄좌 예비군 무기고를 지키고 있는 광부들      © 박노연씨 제공

 

 

진실화해위는 “4월 21일 밤의 혼란 상황에도 불구하고 시장 상인과 민가에 대한 피해는 거의 없었으며 공격의 대상이 주로 평소 광부들의 원성의 대상에 국한되었다는 점이 인정된다. 또 시위 농성의 주체들이 비조직적이었으며 투쟁의 대상을 명확히 설정하지 못하고 체계적인 지휘가 부재하였으며 통제되지 않은 불만의 폭발로 인해 막대한 물적 인적 피해를 낳았고 일부 직원 사택의 재산을 파괴한 행위가 있었다는 점도 확인된다”고 설명했다.

 

진실화해위는 이어 “교통사고 직후 분노한 광부와 주민들의 폭력행위가 통제되지 않는 상황에서 당시 일부 광부들은 위험시설인 화약고와 무기고를 지켜 더 큰 피해를 사전에 예방할 수 있었다”면서 “정기적인 군사훈련을 받고 있던 30~40대 위주의 남성 광부들이 무장했을 경우 그 피해는 상상을 초월하는 상황이었다. 사북사건 기간 중 일부 술에 취한 주민들의 행패에도 불구하고 화약고와 무기고를 안전하게 지킨 동원탄좌 광부들의 이성적 행동이 극단적인 사태를 막을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사북 주민들이 안경다리 사건 이후 광부들에게 쫒기는 경찰관을 돕는 사례도 많았다. 박낙현 심을보 등 다수의 사북주민들은 부상당한 경찰들을 자신의 차량으로 병원까지 후송하고 광부들에게 쫒기는 경찰을 민가에 숨겨주고 민간인 복장으로 갈아입혀 돌려보내는 등 인명피해를 줄이는데 큰 기여를 했다.

 

사건이 숨 가쁘게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광부들을 대표하는 수습위원과 당국과의 사이에는 원만한 사태수습을 위한 노력이 계속 되고 있었다.

 

이원갑 회장의 증언이다.

 

“4월 22일 아침 8시경 제일약국 최홍원이 나를 보자고 했다. 수습대책본부가 설치되어 있는 고한파출소에 데리고 갔다. 들어가보니 강원도지사 강원 도경국장 등이 있었다. 들어선 나를 보던 도경국장은 대뜸 ‘니가 이원갑이야?’라고 하더니 곧 바로 ‘이 새끼 가두라’고 명령했다.

 

그리고는 경찰 300여명 데리고 진압하러 간다고 하더라. 그래서 내가 지금 광부들이 흥분해 있는데 진압하다가 서로 피해가 발생할 거라고 하면서 말렸다. 그는 ‘이 새끼 말이 많다. 데려가’라고 했다. 삼척탄좌 객실에 갇혀 있었다.

 

오후 4시경 국장이 부른다고 해서 나가보니 서울에서 광산노조 최정숙 위원장이 경찰 헬기를 타고 왔다면서 내려와 있었다. 그날 오전 경찰 진압에 문제가 있었다고 했다. 현재 광부들한테 지부장 부인이 붙잡혀 기둥에 묶여 있다. 자기들은 도저히 풀 방법이 없다면서 나보고 내려가서 풀어주고 협상안을 가지고 오라고 했다. 협상안 말이 나온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23일 오후 시내에 있는데 어떤 사람이 나한테 오더니 오늘밤 12시에 공수부대가 투입된다고 하더라. 그래서 그 얘기를 참모들에게 건네니까 공수부대가 투입되면 광부들만 다치고 아무런 성과도 없이 허무하게 끝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공수부대가 들어오면 항거하기 위해서 무장을 하려고 했다. 당시 무기고는 우리 참모들이 철저하게 통제하고 있었다. 이렇게 돼서 우리가 무장을 할 것이라는 정보가 위로 올라가니까 수습대책위도 비상이 걸렸던 것 같다. 그 때부터 협상은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24일 아침 8시경 협상안이 타결될 수 있었다. 만약 우리가 무기고를 지키고 있지 않았고 무장의 가능성이 없었다고 한다면 불과 20여일후 광주에서와 같은 더 큰 비극이 발생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진실화해위는 “1980년 4월 22일부터 24일간 협상과정은 계엄사령부의 공수부대 투입계획과 맞물리며 긴박하게 진행되었다. 최종 협상이 진행되던 4월 23일 밤 계엄사령부는 4월 25일 새벽을 군 병력 투입시점으로 정해놓고 11특전여단 2개 대대병력에게 작전명령과 부대 배속결정을 내린 상황이었다. 따라서 사태 핵심 당사자들이 대화와 협상을 통해 합의문을 작성하고 평화적으로 타결한 것은 대규모 충돌사태와 더 큰 인명피해의 가능성을 사전에 막을 수 있었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했다.

 

#사흘이 지난 ‘사북’...사람들 마음의 상처는 평생 동안 가슴속에 

 

수습대책위와 대화에서 경찰은 가담자들에게 실력행사를 하지 않는 것은 물론 최대한 원만히 해결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그 약속은 종이쪽지에 불과했다. 합의문 발표에 따라 광부들이 해산 후 업무에 복귀한지 열흘 만에 검거 작전이 개시됐다. 사북에서 정선으로 끌려가는 과정에 대해 연행자들은 지옥이었다고 술회했다.

 

끌려간 광부들에게는 무차별적인 폭행과 물고문이 자행됐다. 충격적인 것은 연행된 광부 부인들에게 가해진 경찰관들의 성고문이었다. 진실화해위가 지난 2006년 1차 조사에서 피해자들로부터 청취한 내용이다. 

 

# 1.5m 정도 네모난 각목으로 전신을 맞았습니다. 엎드려 놓고 세워놓고 때렸습니다. 여자들은 윗옷을 벗겨 젖가슴을 쥐어뜯었습니다.

 

#여자들은 그놈들이 팬티를 벗겨놓고 왼쪽 오른쪽 하며 희롱을 했습니다. 아랫도리의 털을 뽑고 그랬습니다.   

#나중에는 팬티가 피에 젖어 살갗에 들러붙었어요. 또 유방을 비틀고 젖꼭지를 잡고 비틀어 살갗이 벗겨질 정도였지요. 아랫도리 털을 뽑고 몸을 마구 만지고 그랬습니다.

 

#조사를 하면서 바른말을 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저의 젖가슴을 우악스럽게 마구 잡아 제키고 쥐어뜯고 저의 음부 털을 손으로 모두 뽑고 하여 그 당시 저의 음부털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 당시 저의 나이가 41세 이었습니다.

 

#풀려난 여자들은 집에 틀어박혀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또 그런 얘기를 하고 다니지도 않았습니다. 내 짐작에 그들도 말은 안하지만 같은 고통을 겪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런 얘기를 하기가 쉽지 않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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